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로드 오킨렉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 전쟁이 끝난 뒤 오킨렉은 1946년에 왕의 부관직을 끝낸 후 [[원수(계급)|원수]]로 진급되고 [[기사]] 작위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정책에 대해서는 불명예스러운 정책이라며 비판했다. 문제는 오킨렉의 이러한 비판이 인도 총독인 마운트배튼 제독과 갈등을 빚게 하는 일이었다는 점.[* 마운트배튼은 내각으로부터 인도를 최대한 온전하게 독립시키되,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 영국의 위신 손상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조치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그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을 수준으로 커졌고, 그래서 마운트배튼은 플랜 B인 분리 독립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 와중에 오킨렉이 불명예적인 정책이라며 비판을 해 내부 총질을 하니 당연히 총독 입장에서는 고까울 수밖에 없다.] 마운트배튼 백작은 오킨렉을 [[파키스탄]] 쪽 주둔군 사령관으로 보냈다. 인도인을 좋게 대해준다는 소문으로 [[파키스탄]]에서는 오킨렉을 껄끄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오킨렉은 중립적으로 파키스탄군을 대했지만 파키스탄인들에게 차별대우를 한다는 비난과 고발이 이어지자 1947년 사령관직에서 물러난다. 어차피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오래가지 않은 직위이긴 했다. 오킨렉은 1948년에 영국으로 돌아오며 실질적으로 퇴역한다. 영국군의 원수는 종신직이며, 모든 보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현직 시절의 절반의 급료를 지급받는 특혜를 누리기에, 일단 서류상으론 본인이 이것도 포기하지 않는 이상은 현역 군인 신분이 유지된다. 퇴역 이후에는 이런저런 활동으로 소일했는데, 특이하게도 처칠처럼 수채화 화가로도 제법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후 1967년에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1981년 3월 23일에 97세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